본문 바로가기
심리학

칼 융 소개

by 이노기87 2024. 7. 6.

 

칼 융 소개

 

카를 구스타프 융(독일어: Carl Gustav Jung  1875년 7월 26일 ~ 1961년 6월 6일)은 스위스의 정신의학자로 분석심리학의 개척자이다.

 

콤플렉스와 집단무의식의 개념을 정립하고 성격을 내향형과 외향형으로 분류하였다. 한때 프로이트와 교류하며 공동연구를 하였으나, '리비도'에 대한 견해차이를 계기로 결별하여 독자노선 걸으며 분석심리학이라는 분야를 개척하였다.



 

 

칼 융

 

 


출생과 성장


카를 융의 부친은 폴 융으로 바젤에서 저명한 약학교수였던 카를 구스타프 융(1794-1864)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폴 융은 경제적인 성공을 원했지만 이루지 못했고, 스위스 개혁 교회의 작은 시골 목사로 평생 지냈다.

 

카를 융의 모친인 에밀리 프레이스바크는 5세기 이상 스위스에 거주한 후손으로 바젤의 기독교도이며 학자였던 사무엘 프레이스바크의 둘째 아내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사무엘은 바젤에 있는 개혁교단의 대표에게 주어지는 지위를 가졌었고, 바젤 대학의 히브리어 학과 교수이며 작가였다. 융의 부친인 폴 융은 융이 6살 때 라우펜에 있는 더 큰 교구로 임명되었으며 그때, 그의 아내와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융의 모친은 성격이 특이했으며 우울증을 겪었고, 침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밤에 귀신을 보았다는 등의 착란을 보였다.

 

 

 

 


연구 활동


바젤 대학교와 취리히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정신과 의사가 되었다. 부르크휠츨리 정신병원에서 일하면서 병원의 원장이었던 오이겐 블로일러(Eugen Bleuler)의 연구를 응용해 심리학 연구를 시작하였으며 이전 연구자들이 시작한 연상 검사를 응용하면서 자극어에 대한 단어연상을 연구하였다. 이 연상은 성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당시 학계에서 자주 금기시 되고는 하였다.


그는 특정한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지금은 유명해진 '콤플렉스'라는 단어를 사용해 이에 관련된 학설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또한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함께 정신분석학 연구를 하기도 했지만 프로이트의 성욕중심설말고도 알프레트 아들러의 사회심리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913년을 전후해서 독자적으로 이들의 양립에 관한 연구로 분석심리학설을 작업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그는 인간의 내면에는 의식과 무의식의 층들이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한걸음 더나아가 특히 개체로 하여금 내면의 무의식들이 통일된 전체를 실현하게 하는 자기원형이 초월적 기능(transcendental function)이 있음을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심리치료법을 개발하여 이론화하였고 심리치료를 받는 사람들에게 '개체화'(individuation, 또는 자기실현)라고 하는 자신의 신화를 추구하는 과정을 통해 좀 더 유연하고 온전한 인격체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융의 심리학


융은 한 개인의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집단무의식이 대립구도(enantiodromia)를 이루면서 이러한 대립속에서 끊임없이 조화를 향해 역동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리고 이러한 심리학적 연구가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 길일 것으로 여겼다.

 

한편 이러한 맥락에서 융은 인간이 겪는 괴로움과 고통이 심리적 사회적 성숙으로 이어지는 긍정적인 결과로서 삶에 대한 겸손(humble)을 주요하게 언급한 바 있다.

 

 

 

 

 


프로이트와의 교류


융은 프로이트와 지적으로 성장하는 시기에 교류하였다. 1900년대 초기에는 심리학이 학문으로 보여지기에 초기단계였지만, 융은 프로이트의 새로운 "심리-분석"에 대해 전적으로 옹호하였다. 그 당시 프로이트는 그의 사상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 협력자를 필요로 하였다.

 

융은 1907년 3월 3일 프로이트를 비엔나에서 처음 만났다. 6개월이 지난 후 50세의 프로이트는 그의 최근 에세이를 쮜리히에 있는 융에게 보내었고, 그 후 6년 동안 많은 교류가 진행되었다.


프로이트와 의견 대립이 발생하며, 1914년에 정신분석학회를 탈퇴하고, 그 이후 자신의 심리학(분석심리학이라 일컬음)을 수립하는 데 노력하였다. 프로이트는 ‘리비도’라고 하는 개념을 성적(性的)인 것에 한정되었다고 본 반면에 융은 좀 더 폭넓은 일반적인 에너지라고 보았기 때문에 이런 견해차로 인해 두 사람은 결별을 하게 되었다.

 

 

 

프로이트와의 결별

 


융과 프로이트의 관계는 처음에는 상호 존경의 관계였으며, 융은 정신분석 운동에서 명백한 프로이트의 상속자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무의식과 리비도의 본질에 대한 그들의 서로 다른 견해는 극적인 분열을 가져왔습니다. 프로이트는 성적 충동을 행동의 주요 동기로 강조한 반면, 융은 더 넓은 범위의 정신적 에너지를 믿었고 영적, 문화적 차원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노년과 유산


프로이트와 결별한 후에도 융은 계속해서 독립적으로 이론을 발전시켰으며, 광범위하게 여행하고 다양한 문화와 영적 실천을 연구했습니다. 그는 "심리학적 유형"(1921), "원형과 집단 무의식"(1934), 자서전 "기억, 꿈, 반사"(1962)를 포함하여 수많은 작품을 출판했습니다.


융의 영향력은 심리학을 넘어 예술, 문학, 종교 연구까지 확장됩니다. 그의 개념은 광범위한 분야에 영감을 주었으며 다양한 치료 관행에 통합되었습니다. 취리히의 칼 융 연구소(Carl Jung Institute)는 그의 유산이 지속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분석가들에게 그의 방법을 교육하고 있습니다.

 

 

 

 

 

말년과 사망


그는 1914년 사임하기까지 국제정신분석학회 회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ETH Zürich)의 심리학 교수, 바젤 대학교의 의학심리학 교수로 재직하였었고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융의 심리학


융은 한 개인의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집단무의식이 대립구도(enantiodromia)를 이루면서 이러한 대립속에서 끊임없이 조화를 향해 역동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리고 이러한 심리학적 연구가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 길일 것으로 여겼다.

 

한편 이러한 맥락에서 융은 인간이 겪는 괴로움과 고통이 심리적 사회적 성숙으로 이어지는 긍정적인 결과로서 삶에 대한 겸손(humble)을 주요하게 언급한 바 있다.

 

 

 

 

 

 

 

 

결론


인간 정신의 이해에 대한 칼 융의 공헌은 심리학과 그 너머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습니다.

무의식, 원형, 개성화 과정에 대한 그의 탐구는 인간 행동의 복잡성과 개인적 성장 및 자기 실현 추구를 이해하는 데 풍부한 틀을 제공합니다.

 

 

 

 

 

칼 융의 분석심리학

분석심리학 융은 한 개인의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집단무의식이 대립구도(enantiodromia)를 이루면서 이러한 대립 속에서 끊임없이 조화를 향해 역동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리고 이

baula100.com

 

 

 

 

 

'심리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울 척도 BDI  (0) 2024.07.10
정신분석학  (0) 2024.07.07
칼 융의 분석심리학  (0) 2024.07.05
문장완성검사  (0) 2024.07.04
인지 편향  (0) 2024.07.03